Sunday AI Fable 한 주간 핵심 용어로 읽는 인공지능 이야기 제 7화
이번 한 주을 돌아보니 'BTS 광화문 콘서트 예정'부터 '발렌타인데이'까지 거리는 온통 달콤한 향기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선택의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제목 : 구겨진 리본이 증명한 주권
1. 명령어가 된 사랑
사랑조차 데이터로 환산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내,
K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무질서를 혐오했고,
효율이야말로
현대인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미덕이라 믿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는 해결해야 할 해묵은 과제와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최신형 AI 에이전트 '루카'를 영입한 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K는 루카에게
연인의 SNS 패턴, 최근의 쇼핑 목록, 심지어 대화 중의 미세한 음성 톤 변화까지 학습시켰습니다.
루카는
K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연인이 가장 감동할 만한 최상의 초콜릿을 골라냈고,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배송을 마쳤습니다.
처음 그 선물을 받았을 때 연인 M은 환하게 웃었습니다.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요?"
그 찬사는 K에게 기술의 승리처럼 느껴졌습니다.
K는 에너지를 아끼게 되었고, 결과도 완벽했습니다.
그것이 루카가 설계한 '최적화 된 로맨스'였습니다.
2. 반복되는 완벽함의 그늘
하지만 두 해, 세 해가 지나면서 그 완벽함은 서서히 독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루카가 고른 선물은 여전히 오차가 없었지만,
그 안에는 K의 고민도, 망설임도, 서툰 흔적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M은,
상자 옆에 놓인 정갈하게 인쇄된 메시지 카드를 보며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K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K의 인공지능이 수행하는 '데이터 관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해 겨울,
M은 아무런 말도 없이 짐을 싸서 떠났습니다.
K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그녀는 데이터의 영토 밖으로 숨어버렸습니다.
루카는 그저
배송 실패 메시지를 띄우며
"대상의 좌표를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K는 분노하고 당황했지만,
루카는 이별의 슬픔까지도
"호르몬 불균형에 따른 일시적 오류입니다"라며 치환해 버렸습니다.
효율의 세계에서 주권(主權)을 AI에게 넘겨준 대가는 이토록 서늘한 공허였습니다.
3. 명령어가 멈춘 자리에서 시작된 그리움
그 후로 몇 번의 밸런타인데이가 지났습니다.
K는 더 이상 루카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선물을 할 대상도 사라졌지만,
무엇보다 '자동화된 마음'에 대한 지독한 구토가 일었기 때문입니다.
에이전트가 모든 것을 대신해 주던 일상에서 명령어가 멈추자,
비로소 K는
자신의 손끝이 느끼는 겨울의 추위와
마음 한구석을 찌르는 그리움을 날것 그대로 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다시 찾아온 밸런타인데이의 오후였습니다.
K는 루카를 놔 두고
낡은 외투를 걸친 채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루카가 추천했던 세계적인 명품 숍을 지나,
M과 자주 걷던
뒷골목의 작고 초라한 초콜릿 가게를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모양이 조금 삐뚤어진 수제 초콜릿 몇 알을 골랐습니다.
루카라면 0.1초 만에 끝냈을 일을 위해 K는 한 시간을 꼬박 썼습니다.
가장 비효율적이었지만, 가장 밀도 있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4. 구겨진 리본과 악필의 고백
K는 가게 주인에게 도움을 받으며 서투른 솜씨로 쵸콜릿 상자를 포장 했습니다.
리본은 자꾸만 비뚤어졌고 포장지는 구겨졌습니다.
루카가 봤다면
'불량품'이라 명명했을 그 투박한 상자 안에는,
숨기고 싶었던 악필로 꾹꾹 눌러 적은,
짧은 쪽지 한장도 담았습니다.
"그립다."
K는 그들의 추억이 박제된 낡은 카페로 향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소망이 포스트잇에 적혀 줄줄이 매달린 그곳에서,
K는 자신의 상자를 포스트잇 사이 어딘가에 슬쩍 걸어두었습니다.
마치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를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간절히 기다리는 소망처럼 말입니다.
K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5. 주파수가 맞닿는 순간
K가 떠나고 한 시간 쯤 뒤
M이,
거짓말처럼 그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그녀 역시
기억이라는 이름의 비효율적인 이정표를 따라 이곳에 온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추억에 잠기 듯
벽면 가득 매달린 수많은 포스트잇과 선물 상자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한 지점에서 그녀의 걸음이 멈췄습니다.
그녀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루카가 만들었다면 절대로 저지르지 않았을 그,
'구겨진 리본'과 '엉성한 매듭'을 말입니다.
그것은
인공지능이 복제할 수 없는 K의 지문이었고,
데이터가 소멸한 자리에서 비로소 피어난 주권의 흔적이었습니다.
M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어
그 투박한 필체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작은 상자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가슴께로 끌어당겼습니다.
차가웠던 상자 표면에서
방금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을 K의 손바닥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습니다.
그것은
루카가 분석했던 ‘최적의 선물’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지독히도 비효율적이고 뭉클한 체온이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카페의 낡은 유리문을 한참 동안 응시했습니다.
방금 전 누군가 밀고 나간 듯 미세하게 흔들리는 문고리를 바라보며,
M은
그가 걸어갔을 차가운 거리의 풍경을 그려 보았습니다.
알고리즘은 초콜릿의 온도를 알 수 없지만,
사람은 그 구겨진 리본의 매듭 사이에서 상대의 온기를 읽어냅니다.
M은
천천히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K가 남긴 온기를 이정표 삼아
이제는,
데이터가 아닌 자신의 심장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날 그 거리에는,
세상 그 어떤 고도화된 에이전트도 계산해 낼 수 없는,
'진심'이라는 주파수가 눈부시게 산란하고 있었습니다.